대한민국의 집현전. 한글창제 요람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 있습니다. 바로 집현전입니다. 집현전은 단순히 학자들이 모여 글을 읽고 경전을 연구하던 기관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나라의 제도를 다듬고, 왕의 정치를 돕고, 백성을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조선 최고의 지식 공동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집현전의 이름을 오늘날까지 가장 찬란하게 빛내는 업적은 바로 훈민정음, 곧 한글의 창제입니다.
세종대왕의 깊은 뜻과 집현전 학자들의 치열한 연구가 만나 탄생한 한글은 단순한 문자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배우지 못한 백성의 눈과 입을 열어준 혁명적인 문화의 도구였으며, 신분과 계층을 넘어 사람답게 말하고 기록할 수 있게 한 위대한 선물이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시대 학문의 중심지였던 집현전의 성격과 역할, 그리고 한글 창제에 힘을 보탠 집현전 학자들의 삶과 정신을 길게 살펴보겠습니다.
목차
- 1. 집현전은 어떤 기관이었는가
- 2. 세종대왕과 학문 정치의 시대
- 3. 집현전 학자들은 어떤 일을 했는가
- 4. 한글 창제의 시대적 배경
- 5. 훈민정음 창제와 집현전 학자들
- 6.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 대표 학자들
- 7. 한글을 둘러싼 반대와 갈등
- 8. 집현전 학문이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
- 9. 집현전 학자들의 충절과 역사적 비극
- 10. 오늘날 우리가 되새겨야 할 집현전의 정신
1. 집현전은 어떤 기관이었는가
집현전은 조선 제4대 왕 세종이 즉위한 뒤인 1420년에 본격적으로 정비된 왕립 학문 연구기관입니다.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어진 이들이 모인 전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이름만 보아도 집현전이 단순한 관청이 아니라, 인재를 모아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는 상징적인 장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유교적 이념을 국가 운영의 기본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왕권을 안정시키고, 제도를 정비하고, 백성의 삶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뛰어난 학자 집단이 필요했습니다. 세종은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경복궁 안에 학문과 정책이 함께 숨 쉬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집현전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집현전은 단순한 도서관도 아니고, 단순한 대학도 아니며, 단순한 정책연구소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모든 기능을 동시에 가진 복합 기관에 가까웠습니다. 집현전 학자들은 경연에 참여해 왕과 토론했고, 역사서를 편찬했으며, 외교 문서를 검토하고, 농업과 천문, 음악과 의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의 지식을 연구했습니다. 즉, 집현전은 조선이라는 국가를 지탱하는 지식의 심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 기관이 특별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세종이 학문을 단지 왕실의 장식물이나 명분으로 보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학문이 백성을 이롭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실제적인 힘이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집현전은 책 속의 지식을 외우는 공간이 아니라,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살아 있는 지식의 현장이었습니다.
2. 세종대왕과 학문 정치의 시대
조선 역사에서 세종대왕은 단지 성군으로만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 배우기를 멈추지 않았던 왕이었고, 학문을 정치의 뿌리로 삼았던 통치자였습니다. 세종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끊임없이 경전을 읽고, 신하들과 토론했으며, 새로운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의 수준을 높이려 했습니다.
세종 시대에는 천문학, 역법, 농업 기술, 의학, 음악, 군사 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눈에 띄는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측우기와 해시계, 앙부일구, 칠정산과 같은 과학 기술의 발전도 있었고, 농사직설과 향약집성방처럼 백성의 실생활에 필요한 서적도 편찬되었습니다. 이 모든 성과의 중심에는 세종의 관심과 지원, 그리고 집현전 학자들의 연구가 있었습니다.
세종은 학자를 우대했고, 재능 있는 인물을 알아보는 눈이 뛰어났습니다. 젊고 총명한 문신들을 발탁하여 연구에 몰두하게 했고, 그들이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펼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왕과 신하가 함께 공부하고 함께 토론하며 나라를 운영하던 시대, 바로 그 시대가 세종과 집현전이 함께한 시기였습니다.
세종이 특히 위대한 이유는, 지식을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만 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지식이 소수의 전유물이 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학문은 마땅히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사람들의 삶을 이롭게 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한글 창제 역시 이러한 세종의 정치 철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3. 집현전 학자들은 어떤 일을 했는가
집현전 학자들은 조선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급제한 뛰어난 문신들 가운데서도 학문적 능력과 문장력, 사상적 깊이를 인정받은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맡은 일은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의 질문에 답하고, 나라의 제도에 대한 의견을 내고, 필요한 서적을 편찬하며, 외교와 법률, 교육과 예제까지 폭넓게 관여했습니다.
집현전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경연이었습니다. 경연은 왕이 학자들과 함께 경전을 읽고 정치 문제를 토론하는 자리였습니다. 여기서 왕은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질문하고 배우는 존재였습니다. 집현전 학자들은 경연에서 왕의 정책 판단을 돕고, 보다 나은 국가 운영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또한 집현전은 각종 서적의 편찬에도 힘썼습니다. 역사를 정리하고 유교 경전을 해석하며, 백성을 위한 실용서를 만들어 보급했습니다. 조선의 국가 이념을 체계화하고, 법과 예를 정리하는 작업에도 이들의 손길이 닿았습니다. 그래서 집현전은 단지 학문을 생산한 기관이 아니라, 조선의 정신과 질서를 문서로 정리하고 후대에 남긴 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 영역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습니다. 유교 철학만 연구한 것이 아니라, 음악 이론과 천문 계산, 중국과의 외교 문서, 우리말의 음운 구조 등 실로 다양한 분야가 포함되었습니다. 이러한 학풍이 있었기에 한글 창제와 같은 대담하고도 정교한 작업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4. 한글 창제의 시대적 배경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 조선의 공식 문자는 한자였습니다. 그러나 한자는 매우 어려운 문자였습니다. 오랜 시간 배우고 익혀야 했고, 글을 통해 자신의 뜻을 정확히 표현하려면 상당한 지식이 필요했습니다. 양반과 학자들에게는 익숙한 문자였지만, 일반 백성에게는 너무나 높은 벽이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말을 할 수는 있어도 글로 쓰기 어려웠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자신의 사정을 글로 호소하기 힘들었습니다. 관청의 문서나 법률, 교화의 내용은 백성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말과 글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세종은 이러한 현실을 깊이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 담긴 뜻처럼, 세종은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백성이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현실을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새로운 글자를 하나 더 만드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국가가 백성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지식과 권력이 누구의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세종은 백성을 가르치고 살피는 일이 군주의 사명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백성이 쉽게 익혀 날마다 쓸 수 있는 새 문자를 만들 결심을 합니다. 이 결심은 문화적 혁명이자 정치적 결단이었습니다. 어렵고 높은 지식의 세계를 낮고 넓은 백성의 삶으로 내려보내려는 시도였기 때문입니다.
5. 훈민정음 창제와 집현전 학자들
훈민정음은 1443년에 창제되고, 1446년에 반포되었습니다. 이 문자 체계는 소리의 원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만든 문자라는 점에서 세계 문자 역사에서도 매우 독창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자음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뜨고, 모음은 하늘, 땅, 사람의 원리를 상징적으로 담아 구성되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의 중심에는 세종대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작업이 전적으로 왕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의 뜻을 이해하고, 그 이론을 다듬고, 해설서를 작성하며, 실제 사용과 보급에 필요한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훈민정음의 원리와 사용법을 자세히 설명한 훈민정음 해례본은 집현전 학자들의 높은 언어학적 이해와 문장력을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입니다. 문자 하나를 만들고 끝낸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어떤 원리로 소리를 적을 수 있는지까지 체계적으로 설명해 놓았습니다. 이는 단순 창작이 아니라 정교한 학문적 성과였음을 보여줍니다.
집현전 학자들은 중국 음운학과 한자음, 우리말의 특성, 발성 기관의 원리 등을 깊이 연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당시 동아시아 지식 체계를 폭넓게 이해하고 있던 학자들이었기에, 새로운 문자를 만들면서도 그것이 단순히 기이한 발상이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설명 가능한 체계를 갖추도록 힘썼습니다.
훈민정음은 그래서 더 위대합니다. 쉬운 글이지만 가볍지 않고, 간단하지만 조잡하지 않으며, 누구나 배울 수 있지만 결코 허술하지 않은 문자였습니다. 이 치밀함과 아름다움 뒤에는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오랜 사유와 실험, 토론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6. 집현전을 대표한 학자들
6-1. 정인지
정인지는 집현전을 대표하는 원로 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문장과 학문에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 서문을 지은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새 문자의 가치를 학문적으로 정리하고 설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세종의 뜻을 단순히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 한글 창제가 왜 필요한지, 그 원리가 얼마나 정교한지를 유려한 문장으로 드러냈습니다.
정인지의 존재는 집현전이 단순히 젊은 학자들의 집단만이 아니라, 노련한 학문가와 젊은 실무형 학자들이 함께 어우러진 조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문장은 훈민정음이 왕의 변덕이나 일시적 시도가 아니라, 국가적 이상과 학문적 정당성을 갖춘 프로젝트였음을 후대에 증명해 주었습니다.
6-2. 성삼문
성삼문은 집현전 학사로 이름을 떨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문장력이 뛰어나고 학문이 깊었으며, 세종의 총애를 받은 젊은 학자였습니다. 그는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실무와 연구에 참여한 인물로 전해지며, 언어와 문학적 감각을 고루 갖춘 뛰어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삼문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말년입니다. 세종 사후 정치적 격변 속에서 그는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충절의 상징이 되었지요. 학문을 하던 사람이 결국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쳤다는 사실은, 집현전 학자들이 단지 머리 좋은 기술자들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에게 학문은 곧 도리와 책임이었습니다.
6-3. 신숙주
신숙주는 당대 최고의 언어 감각과 외교 실무 능력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중국어와 외교 문서, 음운 연구에 능통하여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실제로 그는 여러 차례 명나라에 다녀오며 언어와 제도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쌓았습니다.
신숙주는 집현전 학자로서 매우 현실적이고 실무적인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조선의 외교와 언어 연구, 제도 운영에 큰 기여를 했던 인물입니다. 다만 후대에는 정치적 선택 때문에 성삼문 등과 대비되며 복합적인 평가를 받습니다. 이 또한 조선 지식인의 삶이 단순한 흑백 논리로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6-4. 박팽년
박팽년 역시 집현전의 대표 학자로, 빼어난 학문과 높은 절개로 이름을 남긴 인물입니다. 젊은 나이에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고, 세종 시대 학문 공동체의 핵심 구성원으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훈민정음 창제에 간접 혹은 직접적으로 관련된 학술 환경 속에서 성장했고, 이후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하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박팽년의 삶은 집현전 학자의 이상이 무엇이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많이 배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배운 바를 바르게 실천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지식과 인격, 문장과 절의가 함께 가야 한다는 조선 선비정신의 한 전형이 바로 박팽년이었습니다.
6-5. 최항, 이개, 하위지 등
집현전에는 이 밖에도 수많은 뛰어난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최항은 학문과 문장으로 명성을 얻었고, 이개와 하위지 역시 재능과 절의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들은 서로 토론하고 배우며 집현전의 학풍을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한글 창제는 특정 한두 사람의 업적만이 아니라, 이러한 집단 지성의 결실이기도 했습니다.
7. 한글을 둘러싼 반대와 갈등
오늘날 우리는 한글을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훈민정음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모두가 환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부 사대부들은 새 문자의 창제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에게 한자는 오랜 문명과 질서의 상징이었고, 새 문자는 익숙한 체계를 흔드는 요소처럼 보였습니다.
특히 최만리 등을 중심으로 한 반대 의견은 꽤 강했습니다. 그들은 조선이 중국 문명을 본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고, 새 문자가 자칫 기존의 질서를 어지럽힐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또한 쉬운 문자가 널리 퍼지면 지식과 권위의 경계가 흐려질 것이라는 두려움도 깔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백성을 위한 길이 분명하다면, 기존 질서의 반대를 감수하더라도 나아가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세종의 깊은 인간애와 통치 철학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한글은 지배층의 편의를 위해 만든 문자가 아니라, 배우지 못한 이들까지 포용하기 위해 만든 문자였기 때문입니다.
집현전 학자들 역시 이 과정에서 큰 부담을 느꼈을 것입니다. 새로운 문자를 연구하고, 이를 설명하고, 반대 속에서도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왕의 뜻과 백성을 향한 대의를 이해하고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냈습니다. 그 용기와 지적 성실함이 있었기에 훈민정음은 역사 속에 뿌리내릴 수 있었습니다.
8. 집현전 학문이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
집현전이 남긴 유산은 한글 창제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조선 전기 문화와 제도, 정치와 학문의 여러 성과 뒤에는 집현전 학자들의 노력이 깔려 있습니다. 왕과 신하가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전통은 조선 정치의 수준을 높였고, 문서와 기록, 제도 정비의 정확성을 높였습니다.
또한 집현전은 국가가 학문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귀중한 사례였습니다. 학문은 현실과 동떨어진 장식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바꾸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농업서를 만들어 농사법을 보급하고, 의학서를 편찬해 질병 치료를 돕고, 예악과 문물을 정비해 나라의 질서를 바로 세운 일들이 모두 그러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한글은 가장 오래 지속된 영향력을 남겼습니다. 한글은 처음에는 널리 퍼지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점차 서민과 여성, 승려와 중인 계층까지 사용 범위를 넓혀 갔습니다. 이후 조선 후기의 소설과 편지, 가사 문학, 민간 기록들이 한글을 통해 풍성해졌습니다. 결국 한글은 조선 사회의 문화적 지평을 넓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높은 문해력과 강한 기록 문화를 갖게 된 배경에도 한글이라는 쉽고 체계적인 문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점에는 집현전이라는 학문의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9. 집현전 학자들의 충절과 역사적 비극
세종이 세상을 떠난 뒤 조선은 정치적 격랑에 휩싸입니다. 문종의 짧은 재위, 어린 단종의 즉위, 그리고 수양대군의 권력 장악 과정은 많은 지식인들에게 선택을 강요했습니다. 이때 집현전 출신 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결단을 내립니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등은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습니다. 이들은 후대에 ‘사육신’으로 불리며 충절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대부분 집현전이라는 학문 공동체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집현전의 정신은 단지 머리로 이해하는 학문이 아니라, 옳다고 믿는 가치를 몸으로 지키는 실천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물론 모든 집현전 학자가 같은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는 현실 정치 속에서 타협했고, 누군가는 살아남아 다른 방식으로 나라에 기여했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단순한 찬양이나 비난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집현전 학자들이 지녔던 학문적 열정과 도덕적 고민이 조선의 정치와 역사 속에서 매우 깊고 무거운 흔적을 남겼다는 점입니다.
학문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결단 앞에 세우기도 합니다. 집현전 학자들의 삶은 지식인의 사명이 무엇인지, 배운 사람의 책임이 어디까지인지를 후대에 묻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울림이 큽니다.
10. 오늘날 우리가 되새겨야 할 집현전의 정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집현전은 무엇으로 남아 있을까요. 오래된 궁궐 속 한 기관의 이름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집현전은 배움이 왜 필요한지, 지식은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문화는 어떻게 사람을 살리는 힘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상징입니다.
집현전의 가장 큰 정신은 아마도 백성을 위한 학문일 것입니다.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앎을 어떻게 세상과 나눌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은 어려운 지식을 높은 담장 안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백성의 삶으로 내려보내려 했고, 모두가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글자를 만들었습니다.
또 하나의 정신은 협력하는 지성입니다. 한글은 천재 한 사람의 번뜩임만으로 이루어진 결과가 아닙니다. 큰 뜻을 품은 왕과, 치열하게 연구하는 학자들, 현실을 살피는 행정과 제도가 어우러져 완성된 성과였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훌륭한 변화는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뜻을 모은 사람들의 진지한 협력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집현전은 지식인의 책임을 일깨워 줍니다. 배운 사람은 세상을 외면해서는 안 되며, 앎은 삶과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현전 학자들 중 많은 인물이 학문뿐 아니라 정치와 도덕의 문제 앞에서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들의 선택이 모두 같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지식이란 현실과 무관한 관념이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맺음말
조선시대 집현전은 학문의 전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는 사람을 위한 지혜가 태어난 공간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세종대왕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문자를 구상했고, 집현전 학자들은 자신의 재능과 학문을 바쳐 그 뜻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훈민정음은 수백 년의 시간을 지나 오늘 우리의 말과 글, 생각과 문화, 기록과 창작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정인지의 문장, 성삼문의 기개, 신숙주의 언어 감각, 박팽년의 절개, 그리고 이름을 다 기록하지 못한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와 고민이 모여 한글이라는 기적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학자였지만, 동시에 모든 시대를 위한 스승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오늘 편안하게 읽고 쓰고 기록하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역사 속 누군가의 치열한 사유와 헌신 덕분입니다. 집현전의 이야기를 돌아본다는 것은 단지 옛 학자들을 기리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식이 어떤 방향으로 쓰여야 하는지, 문화가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그리고 진정한 배움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묻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집현전과 한글 창제의 역사는 과거의 유산이면서도 동시에 현재의 질문입니다. 더 많은 사람이 배우고, 더 쉽게 소통하고, 더 넓게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었던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뜻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들의 정신은 글자 속에 남아 있고, 우리가 쓰는 한 문장 한 문장 속에서 지금도 숨 쉬고 있습니다.
블로그용 요약 문장
집현전은 조선의 학문과 정책, 문화가 꽃핀 지식의 중심이었으며,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은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자 혁명 가운데 하나를 이루어냈습니다.
썸네일 문구 예시
1. 조선 지성의 심장, 집현전 이야기
2.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만든 한글의 기적
3. 백성을 위한 글자, 훈민정음의 탄생
4. 조선 최고의 학자들이 모인 집현전의 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