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난 사랑, 서서평 선교사

조선 땅에 발을 디딘 수많은 푸른 눈의 선교사 중에서도, 가장 낮고 소외된 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내어준 분이 있습니다. 바로 서서평(Elisabeth Johanna Shepping, 1880~1934) 선교사입니다.

그녀가 한국 땅에서 펼친 사랑과 헌신은 단순한 종교적 선교를 넘어, 일제강점기 가장 고통받던 가난한 여성과 한센인, 고아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1.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Not Success, But Service)

독일 출생으로 미국에서 간호학을 공부한 서서평 선교사는 1912년, 32세의 나이에 미국 남장로교 간호 선교사로 처음 한국(당시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그녀의 침실 벽에는 평생의 신조가 적힌 글귀가 걸려 있었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Not Success, But Service)

그녀는 이 다짐대로 평생을 '성공'이라는 세상의 기준을 버리고, 오직 고통받는 이들을 '섬기는' 데만 집중했습니다. 미국 선교부에서 보내주는 선교비조차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온전히 가난한 이들을 먹이고 입히는 데 바쳤습니다.

2. 조선의 가장 낮은 곳을 향한 헌신

서서평 선교사가 활동하던 시대의 조선은 일제의 수탈과 빈곤, 그리고 뿌리 깊은 가부장제와 나병(한센병)에 대한 공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회에서 철저히 버림받은 이들을 찾아 직접 몸을 움직였습니다.

  • 여성 교육과 인권 신장: 당시 이름도 없이 '큰년이', '개똥이'로 불리던 조선 여성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글을 가르쳤습니다. 1922년 여성들을 위한 교육기관인 '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여 여성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또한 조선간호부협회(현 대한간호협회)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을 맡아 체계적인 간호사 양성에 기틀을 닦았습니다.
  • 고아들의 어머니: 길가에 버려진 한센인의 아이들, 가난 때문에 버려진 고아들을 거두어 직접 키웠습니다. 그녀가 정식으로 입양해 기른 수양아들만 14명, 수양딸이 38명에 달했습니다.
  • 한센인 구호와 인권 운동: 당시 전염병이라는 이유로 집과 사회에서 쫓겨나 굶어 죽어가던 한센인들을 돌보았습니다. 최흥종 목사 등과 함께 한센인 요양 시설인 광주나병원 설립을 이끌어냈으며, 한센인들의 치료와 인권 회복을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3. 완벽한 조선인으로 살다

서서평 선교사가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거리를 둔 '시혜자'로서가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서양식 의복을 벗어던지고 늘 흰색 무명치마저고리를 입었으며,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선교사들이 주로 먹던 서양식 음식을 멀리하고 된장국과 보리밥을 먹었으며, 가마나 마차 대신 맨발이나 고무신 차림으로 전라남도 일대의 험한 산길을 걸으며 환자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이러한 지극한 현지화와 사랑 덕분에 주민들은 그녀를 외국인이 아닌 '우리 어머니', '서서평'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다정하게 불렀습니다.

4. 마지막까지 남김없이 베푼 삶

평생을 영양실조와 만성 풍토병(스프루)에 시달리면서도 환자들을 돌보던 서서평 선교사는 결국 1934년 6월 26일, 54세의 나이로 광주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남겨진 유품은 감동을 넘어 숙연함을 자아냈습니다.

유품 목록 유품의 용도 및 상태
현금 7전 전 재산의 전부
강냉이가루 반 홉 마지막 남은 식량
담요 반 장 남은 반 장은 다리 밑의 거지에게 찢어줌
자신의 시신 의학 연구용으로 해부용 기증

그녀의 장례는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엄수되었습니다. 수많은 나병 환자들과 거지, 가난한 여성들이 "어머니, 어머니..."를 부르며 눈물로 운구 행렬을 따랐고, 당시 동아일보는 그녀의 죽음을 전하며 '재생한 예수'라는 최고의 헌사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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