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에서 금석문(비석에 새겨진 글)은 당시의 시대상과 국가의 의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유산입니다. 고구려 전성기의 기록인 광개토대왕릉비와 조선 말기 자주국방의 의지를 담은 척화비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광개토대왕릉비 (廣開土大王陵碑)
414년, 고구려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당시 수도였던 국내성(현재 중국 지린성 집안시)에 세운 동양 최대 규모의 비석입니다.
📜 주요 특징 및 구성
규모: 높이 약 6.39m의 거대한 응회암 사각 기둥으로, 4면에 걸쳐 총 1,775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제1부 (건국 신화): 고구려의 시조 주몽(추모왕)이 북부여에서 나와 고구려를 건국한 과정과 역대 왕들의 계보를 기록하여 국가의 정통성을 강조했습니다.
제2부 (훈적 기사): 광개토대왕의 활발한 정복 전쟁(비려, 숙신, 백제, 신라 구원 등)을 연도별로 상세히 기술했습니다.
제3부 (수묘인 기사): 왕릉을 관리하는 가구(수묘인)의 명단과 관리 규칙을 기록하여 조상을 모시는 정성을 보였습니다.
⚠️ 역사적 쟁점: 신묘년(辛卯年) 기사
비문 중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식의 해석이 가능한 문구가 있습니다. 일본은 이를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으나, 한국 학계는 문맥상 고구려가 왜를 격퇴하고 백제와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는 주어 생략형 문장으로 해석하거나, 일제강점기 당시 비문 변조 가능성 등을 제기하며 반박하고 있습니다.
2. 척화비 (斥和碑)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승리로 이끈 직후, 서구 열강의 통상 요구에 절대 응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1871년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입니다.
📜 비문 내용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 역사적 가치와 시대적 한계
자주 의지의 표명: 외세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고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강력한 항전 의지의 상징입니다.
쇄국 정책의 결정체: 당시 급변하던 국제 정세 속에서 '문호 개방'을 거부하고 전통 체제를 수호하려 했던 흥선대원군의 대외 정책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결과: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실권하고 청나라로 압송되자, 일본 공사의 요구 등으로 대부분 철거되거나 파묻혔습니다. 현재는 일부만이 발굴되어 박물관 등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3. 한눈에 비교하는 두 비석
구분
광개토대왕릉비
척화비
건립 시기
5세기 (고구려 장수왕 2년)
19세기 (조선 고종 8년)
건립 목적
왕의 업적 찬양 및 묘지 관리
외세 배척 및 항전 의지 고취
주요 특징
동양 최대 규모, 고구려 천하관 반영
전국적인 설치, 위정척사 사상 반영
역사적 의미
동북아시아 패권 국가의 증거
근대화 지연 vs 자주국방 의지
광개토대왕릉비가 팽창하는 국가의 자부심을 담았다면, 척화비는 밀려오는 위협 속에서 나라를 지키려 했던 절박한 결기를 담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명인 공자의 사상은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대를 관통하여 '인간관계의 본질'과 '사회적 조화'를 다루는 살아있는 지혜입니다. 공자가 말한 고전적 진리와 이것이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참 진리로 재탄생하는지 살펴봅니다.
1. 공자 사상의 핵심 진리: 인(仁)과 예(禮)
공자 사상의 출발점과 종착점은 결국 '사람'입니다. 혼란스러운 춘추전국시대에 그가 제시한 해답은 인간 내면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① 인(仁) - 사람다움의 완성
인은 공자 사상의 최고 가치로, 단순히 '착한 마음'을 넘어선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사랑'입니다. 나를 닦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의 확장을 의미합니다.
② 예(禮) - 내면의 형상화
예는 내면의 인(仁)이 밖으로 드러나는 질서이자 형식입니다. 공자는 형식이 없는 마음은 무례하고, 마음이 없는 형식은 가식이라 보았습니다. 즉, 예는 타인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사회적 약속입니다.
③ 군자(君子) - 도덕적 주체
군자는 혈연적 귀족이 아니라, 끊임없는 수양을 통해 도덕적 완성을 지향하는 사람입니다. 공자는 누구나 노력을 통해 성숙한 인격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했습니다.
2. 현대 사회에서의 '참 진리'로의 재해석
디지털 전환과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공자의 가르침은 오히려 더 강력한 실존적 해답을 제공합니다.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기소불욕 물시어인, 己所不欲 勿施於人)."
① 서(恕)의 미학: 공감과 역지사지
혐오와 갈등이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가장 절실한 진리는 타인의 처지를 헤아리는 '서(恕)'입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을 넘어 소통의 핵심이자 진정한 민주주의의 기초가 됩니다.
② 수기안인(修己安人): 자존감과 책임
현대인은 타인의 시선에 극도로 의존합니다. 하지만 참 진리는 나를 먼저 바로 세우고(수기), 그 안정을 바탕으로 주변을 평안하게 하는(안인) 데 있습니다. 보여주기식 삶이 아닌 내면의 성찰이 현대적 행복의 조건입니다.
③ 화이부동(和而不同): 다양성 속의 조화
남과 화목하게 지내되 무작정 휩쓸리지 않는 태도는 현대 사회의 건강한 개인주의와 일맥상통합니다.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는 균형 감각이야말로 오늘날의 참된 진리입니다.
3. 공자 사상과 현대적 가치 비교
전통적 가치
현대적 재해석 (참 진리)
효(孝)와 제(悌)
가족을 넘어선 사회적 연대와 배려
학(學, 배움)
성장을 위한 평생 학습과 유연한 사고
중용(中庸)
극단을 피하는 균형과 갈등 조정력
대동사회
지속 가능한 공동체와 인류애
결론: 기술의 시대, 인간으로 돌아가기
현대 사회의 참 진리는 더 이상 지식의 양이나 기술의 속도에 있지 않습니다. 공자가 2,500년 전 외쳤던 진리는 오늘날 "기술이 발전할수록 더욱 인간다움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로 귀결됩니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忠), 타인을 나와 같이 대하며(恕),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中) 태도. 이것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선명한 진리입니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유교 철학의 기틀을 확립한 인물입니다. 그의 사상은 단순히 도덕적인 가르침을 넘어,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신뢰와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그가 설파한 고난에 대한 관점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삶의 무게에 짓눌린 이들에게 강력한 위로와 용기를 제공합니다.
1. 맹자의 근본 사상: 성선설과 왕도정치
① 인간 본성에 대한 긍정, 성선설(性善說)
맹자 사상의 뿌리는 성선설입니다. 그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한 마음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사단(四端)'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도덕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네 가지 본능적인 마음입니다.
사단(四端)
정의
성숙한 덕목(사덕)
측은지심(惻隱之心)
타인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인(仁)
수오지심(羞惡之心)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의(義)
사양지심(辭讓之心)
겸손하게 양보하고 공경하는 마음
예(禮)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
지(智)
맹자는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고 깜짝 놀라 구하려는 마음은 보상을 바라는 것도, 명예를 위한 것도 아닌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선한 싹을 잘 키워내는 것이 바로 수양의 핵심입니다.
② 정의로운 통치, 왕도정치(王道政治)
정치적으로 맹자는 힘과 권력으로 백성을 억압하는 '패도(覇道)'를 비판하고, 임금이 덕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는 '왕도정치'를 주장했습니다. 그는 백성이 국가의 근본임을 강조하는 '민본주의'를 내세웠으며, 백성의 생계를 보장하는 '항산(恒産)'이 있어야 도덕적 마음인 '항심(恒心)'이 유지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2. 하늘이 당신에게 시련을 주는 이유: 고자장(告子章)의 지혜
살면서 우리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왜 하필 나인가?"라는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 맹자는 《맹자》 고자 하(告子 下) 편을 통해 명확한 답을 내려줍니다. 이 구절은 동양 철학에서 고난을 해석하는 가장 위대한 문장으로 손꼽힙니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임무(大任)를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必先苦其心志), 그 몸의 뿌리와 뼈를 수고롭게 하며(勞其筋骨),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餓其體膚), 그 처지를 궁핍하게 하여 그가 하는 일마다 어긋나고 뒤틀리게 만든다(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이 문장은 단순히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낙관론이 아닙니다. 하늘이 인간을 단련시키는 구체적이고 치밀한 프로세스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 왜 이런 가혹한 과정을 거치는가?
맹자는 그 이유를 두 가지 핵심 키워드로 정리합니다. 바로 동심인성(動心忍性)과 증익기소불능(曾益其所不能)입니다.
동심인성(動心忍性): 마음을 두드려 일깨우고 성질을 참을성 있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평탄한 삶에서는 인간의 영혼이 깨어나지 않습니다. 극심한 고통과 좌절 속에서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보며,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단단한 자아를 형성하게 됩니다.
증익기소불능(曾益其所不能): 그가 과거에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능력을 키워준다는 뜻입니다. 시련은 인간의 한계를 확장시킵니다. 밑바닥까지 떨어져 본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포용력을 갖게 되고, 실패를 극복해 본 사람만이 거대한 과업을 완수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② 고난은 선택받은 자의 훈장
맹자의 관점에서 시련은 벌이 아니라 '하늘의 부름'입니다. 아무런 가능성이 없는 자에게 하늘은 시련을 주지 않습니다. 큰 그릇이 될 재목이기에, 그 그릇을 굽기 위해 뜨거운 불가마 속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크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맡겨질 미래의 임무가 그만큼 막중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3. 시련을 대하는 태도: 우환(憂患) 속에 살고 안락(安樂) 속에 죽는다
맹자는 "생어우환 사어안락(生於憂患 死於安樂)"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는 "걱정과 근심 속에 있으면 살 것이요, 안락함에 빠져 있으면 죽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결핍과 위기 속에서 오히려 생명력을 발휘하고 발전하지만, 모든 것이 갖춰진 안락함 속에서는 나태해지고 결국 도태된다는 경고입니다.
그는 역사 속의 위대한 인물들을 예로 듭니다. 농사를 짓다가 부름을 받은 순임금, 감옥에 갇혔던 부열, 시장에서 소금을 팔던 교격 등, 성현이라 불리는 이들은 모두 인생의 밑바닥에서 처절한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겪은 굶주림과 멸시는 그들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성인(聖人)으로 가는 필수 코스였습니다.
4.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
맹자의 사상은 2,000년 전의 낡은 기록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사회적 경쟁, 경제적 빈곤, 정서적 고립은 맹자가 말한 '행불란기소위(行拂亂其所爲, 하는 일마다 뒤틀리는 상황)'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면, 다음의 세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운명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지금의 고통은 당신을 파괴하기 위함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 근육을 단련시켜(동심인성)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성장의 기회로 삼으십시오: 시련의 시간은 당신의 부족했던 능력(소불능)이 채워지는 시간입니다. 이 과정을 견뎌낸 뒤의 당신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단단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큰 꿈을 간직하십시오: 하늘이 당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이유는 당신이 '대임(大任)'을 맡을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늘이 점찍은 예비 리더입니다.
결국 맹자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희망'입니다. 고통의 한복판에서도 인간의 선한 본성을 믿고, 자신의 가치를 신뢰하며,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갈 때 비로소 하늘이 예비한 '큰 사명'에 가닿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시련은 결코 헛된 소모가 아니라, 찬란한 미래를 위한 가장 가치 있는 투자입니다.
우리 역사 속에는 혼란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세운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은 분열된 후삼국 시대를 통일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 위대한 군주로 기억됩니다. 왕건은 단순히 전쟁을 잘하는 장수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고 나라를 하나로 묶는 지혜를 지닌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삶은 혼란의 시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후삼국의 혼란 속에서 태어난 인물
왕건이 태어난 시기는 신라가 점차 힘을 잃어가던 혼란한 시대였습니다. 신라는 오랜 세월 삼국을 통일하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왕권은 약해지고 지방에서는 호족이라 불리는 세력들이 점차 강해졌습니다. 백성들의 삶은 어려워졌고, 곳곳에서 반란과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나라 전체가 흔들리던 시기에 새로운 영웅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바로 송악 지방의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난 왕건이었습니다.
왕건의 집안은 해상 무역과 지방 세력을 바탕으로 상당한 경제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넓은 세상을 접하며 자랐고, 사람을 대하는 법과 세상을 읽는 안목을 자연스럽게 익혔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훗날 그가 단순한 장수를 넘어 한 나라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궁예의 부하에서 영웅으로 성장하다
당시 혼란한 정세 속에서 궁예는 새로운 세력을 일으켜 후고구려를 세웠습니다. 왕건은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며 빠르게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그는 용맹함뿐 아니라 뛰어난 전략과 판단력을 지녀 많은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특히 전쟁터에서 보여준 침착함과 백성을 생각하는 태도는 다른 장수들과 구별되는 왕건만의 장점이었습니다.
왕건은 궁예 밑에서 충성을 다하며 나라를 위해 힘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궁예의 정치 방식은 점점 폭정으로 흐르게 됩니다. 궁예는 스스로를 신성한 존재처럼 여기며 의심이 많아졌고, 충성스러운 신하들까지 함부로 내쳤습니다. 백성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고, 나라의 기강도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많은 신하와 장수들은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918년, 고려를 세우다
결국 918년, 여러 신하와 장수들은 왕건을 중심으로 뜻을 모아 궁예를 몰아내고 새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왕건은 백성과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고, 나라 이름을 ‘고려’라 정하였습니다. 고려라는 이름에는 옛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국호를 정한 것이 아니라, 북방의 기상과 민족의 자부심을 이어가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왕건이 새로운 왕조를 세울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한 군사력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있었고, 혼란한 시대를 끝낼 수 있는 인물이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려의 건국은 단순한 쿠데타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바라는 시대의 요구가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후삼국 통일을 향한 길
왕건이 고려를 세운 뒤에도 한반도는 아직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남쪽에는 후백제가 있었고, 신라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왕건은 무조건 힘으로만 상대를 누르기보다, 외교와 포용 그리고 전략적 전쟁을 함께 사용하며 통일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는 지방 세력들과 관계를 맺고, 적대하던 이들까지도 자신의 편으로 끌어안는 넓은 정치를 펼쳤습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강력한 경쟁자였지만, 후백제 내부의 갈등은 결국 왕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견훤이 아들들과의 권력 다툼 끝에 고려로 오게 되자, 왕건은 그를 원수로만 여기지 않고 예우하며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왕건의 정치적 포용력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입니다. 또한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했을 때에도 왕건은 그를 극진히 대우하였고, 신라 왕실과 귀족 세력을 억지로 짓누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백성들의 반발을 줄이고 자연스러운 통합을 이루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935년에는 신라가 고려에 귀속되었고, 936년에는 후백제까지 무너지면서 왕건은 후삼국 통일을 완성하게 됩니다. 이 통일은 단지 영토를 넓힌 사건이 아니라, 오랜 분열과 전쟁을 끝내고 백성들에게 새로운 안정을 가져다준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왕건의 정치, 포용과 융합의 지혜
왕건이 위대한 군주로 높이 평가받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정치 방식에 있습니다. 그는 적을 무찌른 뒤에도 무조건 제거하지 않았고, 상대 세력의 장수와 호족들을 포용하여 새로운 고려의 신하로 삼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람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고려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왕건은 지방 호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릴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정치적 통합을 위한 지혜로운 방법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지역 세력들을 억지로 누르기보다, 한 나라의 구성원으로 묶어내는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책은 고려 초기에 여러 지방 세력이 반란 없이 중앙과 협력하도록 만드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또 왕건은 불교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당시 불교는 많은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정신적 기반이었습니다. 왕건은 불교를 보호하고 장려함으로써 나라의 통합과 왕권의 안정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물론 이는 단순한 신앙의 차원을 넘어서, 백성들의 정서를 이해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정치적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훈요 10조에 담긴 나라 다스림의 뜻
왕건은 생애의 마지막에 후대 왕들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원칙을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훈요 10조’입니다. 훈요 10조에는 고려 왕조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왕건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불교를 존중할 것, 지방 세력을 함부로 자극하지 말 것, 북방 민족에 대비할 것, 사치와 방종을 경계할 것 등 여러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이 유훈은 단순히 한 왕의 개인적인 조언이 아니라, 고려라는 나라가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한 정치 철학의 정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건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나라를 세우고 통일하는 데 힘썼을 뿐 아니라, 죽은 뒤에도 나라가 흔들리지 않도록 깊은 지혜를 남긴 것입니다.
왕건이 남긴 역사적 의미
왕건은 943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세운 고려는 이후 약 500년 가까이 이어지며 우리 역사 속에서 중요한 왕조로 자리 잡았습니다. 고려는 불교문화와 청자, 금속활자, 국제 교류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문화를 꽃피웠고, 이러한 기반의 출발점에는 왕건의 통합 정치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힘만으로 나라를 세운 정복자가 아니라, 분열된 마음을 하나로 모아 새로운 질서를 만든 지도자였습니다. 특히 원수까지 품는 넓은 마음, 백성의 안정을 먼저 생각한 통치 방식, 후손에게도 나라의 방향을 남긴 책임감은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줍니다. 왕건의 역사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의 인물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혼란한 시대일수록 통합과 포용의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맺음말
왕건은 후삼국의 혼란을 끝내고 고려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운 위대한 군주였습니다. 그는 칼과 전쟁만으로 세상을 바꾼 인물이 아니라, 사람을 얻고 마음을 모으며 시대를 바꾼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왕건은 단순한 건국의 왕을 넘어, 통합의 상징으로 기억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의 삶을 되새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분열과 갈등이 깊은 시대일수록, 왕건이 보여준 포용과 지혜의 정치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